[그림 1] 로페즈가 죽던 날 인천에서 그가 병사들을 월미도 방파제로 이끄는 모습:
가장 위에 있는 병사가 로페즈 중위(출처: wikipedia.org)
[그림 2] 美 해병 볼담어러 로페즈 중위(출처: wikipedia.org)
사랑밭 새벽편지에 "잊혀진 영웅들"이란 제목으로 위의 사진이 소개되었다. 궁금해서 위키피디아를 검색해 보니 해병대 소대장인 볼담어러 로페즈(Baldomero Lopez) 중위의 사진이었다.
아래는 위키피디아에 나온 로페즈 중위의 일대기이다.
로페즈는 플로리다州 탬파(Tampa, Florida)에서 1925년 8월 23일에 태어났고 이보르市(Ybor) 외곽에서 성장했다. 아들과 같은 이름을 가진 그의 아버지 볼담어러 로페즈는 젊은 시절에 스페인의 애스투리아스 지역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왔다.로페즈가 다닌 힐즈버러 고등학교(Hillsborough High School)에서 그는 재능있는 농구선수였으며 학교안에 있는 청소년 ROTC에서 연대 지휘관 역할을 했다. 고등학교 졸업직후 1943년 7월 8일에 美 해군에 입대하여 이듬해 6월 11일까지 복무했다. 제2차 세계대전중에 美 해군사관학교 생도로 선발되었지만 전시 상황으로 인해 3년짜리 속성 과정으로 사관학교를 마쳤다. 1947년 6월 6일에 졸업을 한 후 해병대 소위로 임관했다. 버지니아州 쿠안티코(Quantico, Virginia)에 있는 해병대 장교학교인 TBS(The Basic School)를 마친 후 소대장 훈련 연대에서 소대장 역할을 수행했다. 1948년 로페즈는 중국으로 배치를 받아 청도(靑島)와 상해(上海)에서 박격포 분대장과 소총수 소대장을 지냈다.
중국에서 돌아온 후 캘리포니아州 펜들튼 기지(Camp Pendleton, California)에 배치받아 복무하던 중 한국 전쟁의 발발로 한국전 참전에 자원하게 되었다. 1950년 6월 16일에 중위로 진급하였다. 한국에서 로페즈는 제1해병사단 제5해병대 제1대대 알파중대의 소대장이었다. 1950년 9월 15일에 시작된 인천 상륙 작전에 그도 참가하였다. 이날 해변에 상륙한 후 [그림 1]과 같은 기념비적인 사진의 주인공이 되었다. 사진에 찍힌 직후 그는 북한군 벙커로 수류탄을 투척하려 하였다. 하지만, 북한군의 기관총 공격을 받아 안전핀을 뽑은 수류탄을 아군쪽 땅으로 떨어뜨렸다. 가슴과 오른쪽 어깨에 총상을 입은 상태에서 수류탄 가까이로 기어갔지만 부상으로 인해 수류탄을 다시 던질 수 없었다. 수류탄 폭발로부터 부하들을 보호하기 위해 그는 자신의 몸으로 수류탄을 막았다. 그 후 이어진 수류탄 폭발로 인해 그는 전사하였고 사후에 명예 훈장(Medal of Honor)이 수여되었다. 1951년 8월 30일, 워싱턴 D.C.에서 열린 수여식에서 해군 장관 댄 킴벌(Dan A. Kimball)이 로페즈의 부모에게 이 훈장을 수여했다.
그의 죽음은 최전선에 있는 해병대원들에게 빠르게 퍼져 나갔다. 스크립스-하워드紙 종군기자인 제리 써르프(Jerry Thorp)는 "그는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위대한 용기를 가지고 장렬히 전사했다."라고 로페즈의 죽음을 평가했다. 로페즈는 탬파(Tampa)에 있는 센트리노 아스투리아노 현충원(Centrino Asturiano Memorial Park Cemetery)에 묻혔다. 로페즈를 위한 기념비는 현충원 입구에 서 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올해로 북한군의 기습남침으로 시작된 6.25 사변(事變: 선전포고 없이 시작한 갑작스런 전쟁)이 발생한 지 60주년이 된다. 전쟁의 전환점을 마련한 인천상륙작전. 미국을 포함한 연합군의 막강한 화력으로 인천을 쉽게 수복했다고 책에는 쓰여 있다. 하지만, 이것은 망원경으로 본 시각이고 가까이에서 보면 로페즈 중위와 같은 용맹한 군인들의 희생이 있다.
로페즈 중위의 일대기에는 평범한 사람이 훈련에 의해 용기있는 군인이 되고 군인정신을 몸으로 보여주는 감동적인 이야기가 있다. 오늘날의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희생 위에 서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댓글 없음 :
댓글 쓰기
욕설이나 스팸글은 삭제될 수 있습니다. [전파거북이]는 선플운동의 아름다운 인터넷을 지지합니다.